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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1 주일 | 누가 우리의 가족인가 | 마가복음3:31-35

240211 주일 | 누가 우리의 가족인가 | 마가복음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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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peaker talks about the complexities and challenges of family relationships. They mention that families can be fractured, with strained relationships and unresolved conflicts. However, the speaker emphasizes that God's presence can bring healing and restoration to broken families. They mention the example of Jesus and his own family dynamics, highlighting that even Jesus experienced familial discord. The speaker encourages listeners to seek God's guidance and grace in their own family relationships, trusting in His ability to bring reconciliation and renewal.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 원합니다. 고향에 오신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저는 신림동이 고향이 아닙니다 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어머님이 계신 곳이 고향이지만 또 우리 하늘아버지 계신 곳이 또한 우리의 영적인 고향입니다. 우리 옆에 계신 분에게 이렇게 인사했으면 좋겠습니다. 고향에 잘 오셨습니다. 이걸로 우리 다 고향에 갔다 온 겁니다. 누가 물어보시면 갔다 왔다고 인사하시면 됩니다. 예전 영화 중에 가족의 탄생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아마 보신 분들이 많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엄태웅, 문소리, 고두심 씨가 나오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5년 동안 소식이 없던 남동생 엄태웅이 갑작스럽게 홀로 사는 누나 문소리를 찾아오면서 영화가 시작이 됩니다. 홀로 살던 문소리는 엄태웅을 반갑게 맞이합니다. 대문을 열고 동생을 맞이하는데 능글맞은 동생이 소개시켜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본인이 결혼을 했다면서 여인을 소개시켜주는데 고두심 씨를 소개시켜줍니다. 자기보다 20살 연상의 여인을 갑자기 데려와서 아내라고 소개를 시켜주는 거죠. 문소리 씨는 갑작스럽게 이모뻘되는 올케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또 그렇게 찾아온 동생 부부와 함께 식구가 되었습니다. 한 집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어쩌면 가족은 당연한 것 같지만 당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가족인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전에서는 가족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부부를 중심으로 한 집안을 이루는 사람들 이렇게 정의를 합니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가족이라고 하면 혈연과 또 혼인관계로 맺어진 그런 모임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엄마, 아빠, 누나, 동생 이런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상적인 가족이라고 하면 거실 한가운데 피아노가 한 대 있고요. 또 어린 딸이 피아노를 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엄마가 쟁반에 사과를 예쁘게 썰어서 나오고, 아빠는 소파에 앉아서 보고 있습니다. 또 어린 장난꾸러기 동생이 옆에서 같이 노래를 부릅니다. 이런 모습을 우리는 이상적인 (중산층) 가족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마 여기 계신 분들 중에 아직 거실에 피아노 모시고 사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예전에는 다들 그게 이상적인 가족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가족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습니다. 통계를 살펴보니까 우리나라 가운데 1인 가구의 비율이 3분의 1을 넘는다고 합니다. 직장 때문에, 학업 때문에, 또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홀로 살아가는 사람의 수가 그만큼 된다는 것이죠. 사실 우리 고시촌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이 동네에 밤에 나가보면 수많은 불빛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시원 창문 하나하나가 다 1인 가구들인 것이죠. 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가정에 대한 모습,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상과 달리 현실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화목한 가정을 떠올리지만 그러나 그렇게 화목한 가정은 많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혹시 이번 명절때 안 싸우고 오신 분 계십니까? 네, 훌륭한 가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참 복을 내려주신 가정입니다. 그런데 모이기만 하면 싸우는 가족도 있습니다. 그렇게 싸울 거면 왜 모이는지 모르겠는데 꾸역꾸역 명절때마다 모여서 또 싸우고 흩어지고 다음 명절되면 또 그때 싸웠던 일 다시 끄집어내서 싸우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저희 집 이야기 아닙니다. 그래서 명절이 되면 마치 전쟁터에 가듯이 또 가구를 하고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 갔다가 오면 연장선을 치르는 부분들도 있을 겁니다. 아마 여기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멀쩡한 부부라도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아 보여도 속으로는 그 관계가 곪아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랑이 식어져 있고 관계가 깨어져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 자녀들과의 관계도 그렇죠. 자녀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아 보이지만 이미 속은 또 많이 상해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허목한 가정을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쉽지 않다는 것이죠. 우리가 신앙이 있으나 신앙이 없으나 우리가 가정을 이루어가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어려움을 우리만 겪는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의 예수님께서도 겪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예수님의 형제와 또 자매들 또 예수님의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예수님이 많은 무리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그들이 가까이 오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통해서 예수님께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잠시 나와달라고 청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그러면 잠깐 기다리라고 하든지 아니면 좀 이따가 보자고 하든지 아니면 나가든지 할 텐데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십니다. 오늘 32절의 무리가 다시 한번 예수님께 전합니다.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참나이다" 라고 전합니다. 예수님이 알고 있는데도 모른 척하니까 주변 사람들이 괜히 어색해서 예수님께 한 번 더 그렇게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냐고, 내 동생들이냐고 반문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고 묻는 이 말씀이 저들은 내 가족이 아니다. 저들은 내 식구가 아니다. 그렇게 선을 긋는 것처럼 들립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차갑게 대하고 계실까요? 오늘 본문의 앞부분과 함께 연결해서 봐야 합니다. 마가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실 때에 그 사역에 대해서 대적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특별히 이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사탄의 역사로 생각하고 예수님을 귀신들린 자로 외도하고 모험하는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역을 그렇게 비방하는 것이죠. 그런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이 이어지는 것이죠. 예수님의 동생과 어머니가 왜 예수님을 찾아왔겠습니까? 데려가려고 온 것입니다. 귀신들린 우리 큰형님, 이상한 소리하는 우리 큰오빠 잡아가려고 동생들이 온 것입니다. 심지어 마리아조차 왔습니다. 마리아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나실 때부터 지금까지 그 모든 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여인입니다. 내 배에 아파서 낳은 예수님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마리아도 사람들의 비방에 넘어가버린 것입니다. 귀신의 역사라고 또 귀신들린 것이라고 사람들이 비방할 때에 마리아조차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그렇게 넘어간 것입니다. 그렇게 가족들이 큰아들 예수를 잡으러 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을 외면한 것이 아니라 가족들이 예수님을 버린 것입니다. 가족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긴장 속에서 서약하고 있는 예수님을 가족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귀신들린 자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과 가족들의 불화가 오늘 본문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인가? 누가 내 동생들인가? 나의 말을 믿지도 않고 나를 미쳤다고 여기는 저들이 과연 내 가족인가? 예수님께서 이렇게 외치시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가장 가까워야 할 가족과 단절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단절이 예수님만 겪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도 가족 간에 그런 단절을 경험합니다. 우리가 명절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족 간에 그런 벽을 느끼기 쉽다는 것이죠. 마냥 즐거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족 간에도 불편한 지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족 간에도 돈 때문에 얼굴을 붉힐 때가 있습니다. 또 명절 준비한 일 때문에 어찌 보면 사소한 일 때문에 신경전을 벌일 때가 있습니다. 함께 차를 먹고 누가 먼저 주방에 들어가는지 그것 때문에 신경전이 벌어집니다. 또 쉬다 가라고 하는데 언제 일어나야 할지 이것 때문에도 눈치를 보게 됩니다. 그뿐만이 아니죠. 성공한 형제가 있어도 조심스럽습니다. 사업에 실패한 형제가 있어도 불편합니다. 어린 시절에는 괜찮게 지냈는데 어느 순간 그 관계가 어그러진 것이죠. 요즘은 어떻습니까? 오랜만에 만난 조카들한테 언제 시직하니? 언제 취직하니? 어떤 직장 다니니? 이런 질문 해보셨습니까? 어쩌면 이러한 질문이 무례한 질문이 되어버렸습니다. 사실 오랜만에 만나는데 무슨 말이 하겠습니까? 그런 거 물어봐야죠. 그런데 그런 것조차 묻기 어려운 시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직장일로 또 학업으로 또 함께하지 못하는 가족도 있습니다. 무슨 대단한 이산가족도 아닌데 그렇게 만나지 못하는 가족도 있는 것이죠. 이처럼 가족 간의 문제는 참으로 풀기가 어렵습니다. 차라리 남들이라면 그런 불편한 관계는 그냥 끝내면 됩니다. 안 만나면 되죠.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내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가족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어떤 문제가 있다 할지라도 문제를 풀기가 참 어렵습니다. 이제 와서 그 문제를 다시 꺼내기도 참으로 불편해진다는 것이죠. 어색한 겁니다. 병으로 치면 아주 고질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병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오랫도록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런 고질병과 같은 관계가 있다는 것이죠. 보수신학으로 유명한 어느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 목사님은 대단한 학자였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제자들이 따르고 이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하나의 교단을 이룰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딸이 가족사에 대해서 책을 썼습니다. 공적으로는 존경받는 목사이지만 사적으로는 어떤 아버지인지 기록을 한 것이죠. 그 목사님은 젊은 날에 아내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일들을 하느라 자녀들을 잘 돌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자녀들과의 관계가 어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주님의 일을 한다고 오질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어그러지기 시작한 관계는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대단한 신학도 또 지식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명성 때문에 자녀들의 이러한 호소가 묻혀버렸던 것이죠. 관계가 더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 목사님은 이제 임종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이제 자녀들도 다 장성했습니다. 아니, 이제 그들도 부모가 되었죠. 이제 어린 시절 아버지의 나이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든 작년이 되었습니다. 지난 날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그런 때가 된 것이죠. 중년의 딸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이 문제를 풀어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 가족들 다 모여서 아버지와의 갈등 또 우리 자식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 어려움을 해소하고 가야겠다 이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가족들을 다시 불러 모읍니다. 서로 연락하지 않던 형제, 자매들을 모읍니다. 그렇게 아버지와 함께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서로 눈물로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했을까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기껏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대화를 시도했지만 아버지가 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겁니다. 아버지는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한 겁니다. 오히려 자녀들에게 화를 냅니다. 반항하는 자녀는 저주를 받는다고 큰소리를 칩니다. 전혀 대화를 이어가지 못합니다.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던 것이죠. 그렇게 아버지와의 관계는 끝이 나아버렸습니다. 분명히 법적으로는 가족이었습니다. 혈연으로도 가족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가족이 아니었던 것이죠. 깨어져 버린 것입니다. 참으로 신앙인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어그러진 가족관계를 회복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정을 해야 합니다. 가족이라는 제도가 실은 죄 아래 하락한 제도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의 모든 제도가 그러하듯이 가족이라는 제도도 죄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가정의 가치를 아주 참미하고 그것에 대해서 중요하게 여길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헐리우드 영화를 보더라도 결국에는 가족관의 사랑으로 그 모든 위기를 극복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러나 이 가족이라는 제도가 실은 서로를 고통스럽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잔인한 제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가족이라는 제도를 정하실 때에는 축복하시며 또 복되게 하여 주셨지만 타락한 인간은 이 가족이라는 제도를 서로를 가슴 아프게 하는 그런 비수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쩌면 가족을 통해서 이 땅에서 작은 천국을 맛보고 알기를 원하셨겠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또 지옥을 경험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명절에 뉴스를 보면 심심치 않게 여러 가지 사건, 사고 소식을 듣게 됩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끼리 서로 또 그렇게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또 종종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남편과 아내에게 또 그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또 감정을 폭발하면서 그렇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죠. 물론 그런 흉기만 휘두르는 일만 있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흉기보다 더 날카로운 비수 같은 말을 쏟아 부으며 서로에게 그렇게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술만 먹으면 또 그렇게 폭력을 행사하는 분도 있고 또 도박이나 비수로 또 가족을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누구보다도 상처를 주는 것이 가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가족을 내버려 두지 아니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가족에 대해서 다시 한번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타락한 가족이라는 제도를 새롭게 하기 원하십니다. 가족에 대해서 정의를 하시는데요. 34절의 말씀과 35절의 말씀 같이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군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예수님께서는 가족이 철현이나 혼인으로 세워진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세워지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 가족이고 괜찮아 보일지라도 하나님 뜻 안에 있지 않다면 어그러지고 망가진 가족이 된다는 것입니다. 가족을 이루는 핵심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죠.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의 선포와도 이어집니다. 세례 요한은 마태복음 3장에 이렇게 선포를 하고 있습니다. 3장 9절 말씀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너희에게 이루는 이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세례 요한의 선포가 무엇입니까? 사람들한테 너희 조상이 아브라함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물론 혈통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맞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 뜻 안에 거할 때에 믿음 안에 거할 때에 참나운 이스라엘이 된다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육적으로 아브라함의 피를 타고났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가 그저 제도적으로 우리가 법적으로 또 혈형관계로 우리가 묶여있다고 해서 참된 가족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족이 참된 가족이 되려면 하나님 뜻 안에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볼 때 멀쩡한 가족이 보기 있다 하지 않으십니다. 앞서 말씀드린 엄마, 아빠, 누나, 동생 그렇게 거실에서 피아노 치면서 사과를 깎아먹는 그 가정이 보기 있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성경에 보면 수많은 가족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가족들을 보면 하나같이 문제가 있는 가족들입니다. 소위 결순가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성경을 보면 어떻습니까? 사이가 틀어져서 20년간 서로 죽이려고 한 형제관계가 나옵니다. 야구과에서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또 아내랑 나이 차이가 심하다 보니 서로 대화도 하지 않는 부부가 나옵니다. 이삭과 리브가 부부가 그렇습니다. 또 자기의 믿음을 증명하겠다고 아들을 죽이려고 하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 가부정적인 아버지의 이름은 아브라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부릅니까?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우리가 볼 때에는 다 하나같이 문제의 가정입니다. 결순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계람이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들을 국민이 여겨주십니다. 누가 이들 가정이 정상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려고 하고 형제와 형제끼리 서로 칼을 들고 있고 또 부부간의 그렇게 대화가 단절된 그런 부부, 그런 가정이 어떻게 정상적인 가정이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을 국민이 여겨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들 부부에게, 또 이들 형제에게, 이들 부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물론 그때는 그들에게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상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풀지 못하는 그런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때가 되었을 때에 또 이들을 받아주시고 또 이들을 복되다 인정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극렬이 있었던 것이죠. 지금 우리의 가족이 어떤 모습입니까? 어쩌면 우리의 가족이 무너져 있고 감기가 깨어져 있다 할지라도 괜찮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가족을 돌보아 주신다면 우리의 가족은 어그러지고 깨어진 가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그 가족을 복되게 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이 계시다면 남들이 볼 때에 뭐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어그러진 가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정에 있어서 다 모이지 못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온전한 가정입니다. 비록 명절에도 한상에 둘러앉아 먹고 마시지 못하지만 연락조차 하지 못한 채 그렇게 멀리 있는 가족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주님께서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가족을 사별하였어도 이제는 나만 남았다 할지라도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가정 가운데 함께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족이 되어주시기에 복된 가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고아에게 아버지가 되어주시고 과부에게 의지할 곳이 되어주십니다. 그분이 우리 아버지가 되어주시는 것이죠. 우리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 가정은 누가 망가진 가정이라고, 누가 어그러진 가정이라고, 누가 병든 가정이라고, 누가 깨어진 가정이라고 그렇게 손가락질 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를 모시고 있기에 우리 가족은 온전한 가족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도 가족과의 관계가 깨어진 상황 속에서 오늘 본문에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습니다. 부활 이후에 예수님의 동생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합니다. 모친 마리아도 예수님을 믿기 시작합니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수님의 가족들이 마가엘 다락방에서 함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죠. 예수님이 육신으로 이 땅에 계실 때에는 가족이 아니었습니다.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남보다 못한 관계였습니다. 조롱하고 냉소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활 이후에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참된 가족이 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으로 말미야마 또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들이 온전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도 이렇게 회복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받았던 초대교회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의 가족들도 같은 일들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이들도 가족들과 깨어지는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교를 떠났다는 이유로 이들은 모욕을 당하였고 가족으로부터 잘라내버려졌습니다. 추방당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유로 이들은 더이상 가족을 만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이방인보다 못한 치료를 받았고 또 그렇게 모든 관계가 어그러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버려진 자들, 소위된 자들이 모여서 교회라는 공동체를 이루었던 것이죠. 공동체에게 우리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병들고 또 깨어지고 어그러지고 어찌 보면 비어있는 그래서 남들이 볼 땐 정상이 아닌 가족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을 복되다 하시고 우리를 고쳐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명절에 만난 식구와 친척들 지금 당장은 우리가 그 관계가 어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족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가족을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이 만남에서 넘어서서 더 큰 가족으로 사랑의 띠로 함께 엮어져가는 믿음의 가족들을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한 아버지를 모시기에 우리 모두가 그분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족의 탄생이라는 영화의 끝장면을 나누고 말씀을 뱉도록 하겠습니다. 이 영화가 진행이 되면서 아무 피도 섞이지 않았던 문솔이와 고두심 그리고 동생 엄태용이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사실 불편하죠. 밥이 제대로 넘어가겠습니까? 말을 놓기도 그렇고 안 놓기도 그럴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다가 문솔이와 고두심의 고리가 되는 엄태용이 고두심과 헤어지게 되고 집을 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고두심과 문솔이는 그 집에 남아서 함께 살게 됩니다. 누구보다 돈독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전통적인 가족으로는 사실 묶을 수가 없는데 그렇게 식구가 되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날 때에 대문 밖에서 동생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누나 하고 대문을 두드립니다. 대문을 열고 보니 능글맞은 동생이 와있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한 아가씨를 데려왔습니다. 아마도 새로운 예인이거나 부인일 겁니다. 문소리는 잠깐 동생에게 따라오라고 하더니 대문 밖으로 나갑니다. 그러다 동생을 밀치고는 얼른 들어와 대문을 잠가버리고 김장을 이어가는 것으로 고두심씨와 김장을 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맺게 됩니다. 말 그대로 새로운 가족이 탄생한 것이죠. 철연으로는 엄태웅이 가족일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가족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어찌 보면 아무런 관계없던 자들도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그저 그들의 정으로도 가족이 되는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띠로 엮인 가족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 된 가족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모신 그러한 삼된 가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족되게 하십니다. 우리를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새롭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 은혜를 믿고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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