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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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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지난 시간에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고 있었어요. 운전을 해서 운전하고 운전을 처음으로 시작하고 있는 이곳이 하나하나 알려지게 되었어요. 드디어 인터뷰가 일어납니다. 떨어뜨리고 나도, 스티커 들고 화장실을 보니까, 그것을 잊고, 상당히 우리 스테이지들이 항상 응원해주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이제 감정관념 얘기할 수 있지만, 그 다음에 거기서부터 나오는 내용 중의 하나가, 나라는 게 무엇인가. 내 안에 나라고 하는 불변의 실체가 따로 있는 게 아닌가. 운동을 공유하는 게 일체였으니까, 나라고 하는 것을, 내 안에 있는 수많은 유저들이 함께 운동서로 공유하고 있을 때, 그것이 나라. 이게 맞겠죠. 그런데 당연히 이를 말할 때는, 나라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거제와 생태계라는 것을 느껴질 수 있습니다. 세포도 무슨 세포냐고요. 여러분은 배우셨잖아요. 우리 안에서도 늘 세포들이 두고 나가면, 두고 세포가 생겨나가는데도, 나라고 하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그 세포 자체가 이미 나라가 아니잖아요. 운동을 공유할 수 있는 세포가 나라예요. 세포의 기능과 활동을 계속 이어받고 있으면 유지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실제의 불변에 있어서 유지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 같은 얘기로, 나라고 하는 것도 거대한 수많은 세포들의 통합, 커뮤니케이션 자체가 나라. 그러니까 나라고 하는 것이 일종의 현상으로 드러난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운동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현상으로 드러나는 것. 그래서 나라고 하는 것을 느끼지만, 내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묻고 있는 것을 현상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 나라다 싶습니다. 가을 같은 기운이 들죠. 가을이라는 것을 누구나 느끼지만, 가을처럼 느끼지는 않잖아요. 나라는 건데도, 수많은 세포의 기능으로 떠올라서 생겨나는 것이 뿐이니까, 실체로 될 것 같은 것이 없는 것이죠. 그래서 되게 관심이 있는 것 같아요. 조금 더 말해볼까요? 그래서 어떤 개체들이 나라고 하는 것도, 합성과 세폐를 결권합니다. 운동 자체가 나도 수많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나라 외의 다른 부분과 함께 하나가 되어서 운동을 공유하기 시작하면, 나라가 합성이 되는 것이죠. 이대로 나라고 하는 것도, 어떤 부분이 떨어져 나가면, 나를 그만큼 사랑하는 것이죠. 나와 함께 운동하는 것이죠. 그래서 지난번에 강의를 한번 드렸었죠? 우리 같이 강의하고 있는 와중에 함께 참여하고 있으면, 강의라고 하는 개체를 함께 이루는 것이고, 다른 생각 없으시면 그만큼 효과도 나갈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관계라는 게, 여기 앉아 계시는, 심사위원은 다 앉아 계시지만, 앉아 계시더라도, 자신의 정신이나 생각이나 활동성이, 여기 함께 동영상을 하고 있느냐, 있지 않느냐, 매 순간 달라지는 것이죠. 이 운동 공유 컨셉에 의해서. 그게 잘 될 때는, 오늘의 수업, 캐나다 강정론 3강이라는 수업으로서의 하나의 개체를 같이 이루는 것이고, 끝까지 이기다 하면 합성이 되죠. 물론 이렇게 말씀을 드리니까, 들으시는 분들만 그러시겠지만, 강사 입장도 마찬가지죠. 강사라는 사람으로 강의를 하고 있지만, 이 개체라는 것에 이를 수 있는 것이죠. 이 전체, 들으시는 분들이 다 같이, 하나의 정체성인 것이죠. 물론 영향력이 좀 더 세기는 해요. 정전학적으로는 아니잖아요. 하지만 제가 정전학적으로 강의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도 강의를 하지만, 이 전체 강의에 잘 참여할 수도 있고, 참여 못할 수도 있게 돼요. 그렇잖아요. 강의를 하다 보면, 저도 그런 경우가 있는데, 제 논리가 말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어요. 당황하잖아요. 어떨 때,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말을 해야죠. 그게 되면, 없어지면 할 거잖아요. 아니면 제가 했던 말에 취해서, 제가 강의를 이끌어다니는 게 아니라, 말이 말을 이끌어다니는 거예요.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저도, 이 전체의 계획들을 잘 만들고 있지 못하는 사람 같아요. 써도 잘하는 것이죠. 하지만 아주 집중이 잘되고, 흥분이 좋을 때는, 강의, 강의 내용들이 쭉 다 이어서 갈 때는, 이게 잘 되고 있는 거예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이 공주를 잘 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서, 매 순간마다 탑성과 획득의 방법이 달라요.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걸 바탕으로 해서, 오늘 내용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강의안이 되는 부분은, 이렇게 다 있어요. 슬픔이나 분노가 탄다. 나쁜 감정이 다시 찾아낸다. 기쁨과 슬픔. 오늘 기본적인 주제는, 기쁨과 슬픔을 다루는 것입니다. 이 기쁨과 슬픔은, 슬픔과 감정놀이에서 가장 근본적인 감정이, 이따 설명을 하겠지만, 기쁨, 슬픔, 그리고 욕망까지 하나 더해서, 이 세 가지가 가장 기본적인 감정들이고, 이 외에 다양한 감정들이 많이 있다면, 이것은 이 세 가지의 다양한 차이점이, 제일 기본적인 감정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 그 전에 앞서서, 첫 번째부터는, 다른 글씨와 다른 학생들에게 얘기를 하죠. 그런 경우가 잘 없는데, 지난번에, 교육신분이 다같이 저의 학대를 주셨어요. 저도 예술이 있어서, 학대 반응이 없는데, 학대를 주셨고, 다이오위치 얘기를 예전에 했었잖아요. 질문도 주시고, 다양한 얘기를 하셨고, 그래서, 얘기하자면, 다이오위치 얘기를, K라서 시켰어요. 그런데, 그게 한방편이니까, 감정에 집중해야겠다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잘 피치하시고, 질문을 해 줘서, 태도도 썼습니다. 그래서, 이것으로 공부가 좀 되고, 아, 이럴 때 조금 더 얘기할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하시면, 좋은 얘기를 먼저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팀원은 다이오위치를 조절합니다. 그렇죠? 다이오위치라는 뜻은, 말 그대로, 자유로운 의지예요. 특히 포인트는, 자유소비가 먼저 있습니다. 자유로운 뜻은, 원인이 없다는 뜻이에요. 원인이 없는 의지인 거죠. 그러니까, 어떤 일을 하려고, 의지나 의욕을 쓸 때, 그 의지함을 결정하게 되는, 원인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보통, 짜장면, 짬뽕 등이 많습니다. 짜장면을 먹겠다고 하면, 다이오위치를 먹겠다고 하면, 짜장면을 선택하는 이유와는 관계가 없는 거예요. 어제 짜장면 먹는 영상을 봤다는가, 친구가 먹었다는가, 짜장면 주문지 밖을 지나갈 때, 짜장면을 여기서 먹었다는가, 해서 짜장면을 먹는다는 뜻은, 다이오위치가 아닌 거죠. 어떠한 원인과 인과 조건 없이, 바로 자유롭게 결정해서, 의욕을 준다. 이런 것이 다이오위치인데, 숙의원자는, 그런 다이오위치를 구성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선택은, 인간의 다이오위치에 의한 것 뿐이 아니죠. 이게, 숙의원자로 공부하는 사람 모두가 아는, 아주 큰 의지, 격차를 가져와요. 숙의원자들은, 페디레니의 피카라고 말씀드렸죠? 윤리학의 뜻인데, 다이오의지나, 다이오의 선택 없이, 윤리라고 생각한다. 불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에요. 윤리라고 생각하기엔, 옳고 그런 것도, 옳은 것을 끊겨야 되잖아요. 옳은 길로 살아야 되는데, 다들 느끼시겠지만, 우리는 다, 그렇게 플로리작으로도 못하잖아요. 잘못도도 하고, 문제도 있고, 이 생활을 끊고, 새로운 생활을 올바른 상태로 넘어가야 되는데, 넘어가려는 의지가 필요한 거예요. 자연의 의지가. 그렇죠? 인과적 조건에 대해서 판단했다고 하면, 계속 있던 방식으로 파는 거예요. 그럼 또 넘어가야 되는데, 그러면 당연히, 윤리적 판단을 위해서는, 다이오의지, 다이오가 필수적으로 필요할 거예요. 가능하다는 거죠. 그래야 내 선택도 하고, 공부도 하고,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페디레니는, 다이오의지를 보상하는데, 윤리적 판단을 하고 싶어요. 이게 하나의, 난관은 없어지는 거죠. 왜 이렇게, 예민하다는 건가? 그렇게 많이 기대가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다이오의지를 보상하고, 자기활성성을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기활성성이란 말을 많이 써서, 어제 좀 익숙해서 쓸지 모르겠어요. 자기활성성은, 첫 시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키노다 용어는 아닙니다. 제가 익숙하지는 않습니다. 키노다 용어는 사실 안 돼요. 비슷한 말을 다 하겠지만, 이 글자 그대로 말하는 것은 없어요. 제가 자기활성성이란 단어를, 키노다 삼성성은, 이것이 문제점인 것 같아요. 보통 다이오의지가 없다고 얘기하는데, 저도 그렇고, 다른 연구사나 해설사 같은 분들을 보면, 다이오의지가 없다는 얘기는 항상 나와요. 너무 중요한 얘기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거죠. 다이오의지가 없다고 얘기하는 건 아니죠. 이게 없으니까, 다른 게 있어야 되잖아요. 이걸로 설명이 되는 것도 있으니까, 그냥 없다고 하고 넘어갈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해설사 같은 분들은, 없다고만 하고, 어떻게 됐나 얘기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떤 느낌이냐면, 그러니까, 반대편으로 할 수 있는 개념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나름대로 이런 식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를 한번 비교해 보도록 하죠. 다이오의지를 부정했지만, 이것은, 키노다 사람 전체의 결과래요. 결과라는 뜻은 이런 거에요. 다이오의지를 부정해야지, 해서 부정한 게 아니에요. 나름대로 어떤 책임감과 인정감으로 사람을 해나가고, 쭉 사람을 하다 보니까, 아, 다이오의지를 부정해야 하는 건지, 이렇게 나오는 결론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부터, 다이오의지만 부정해야지,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다이오의지를 부정한 것을 이해하는 데는, 다이오의지를 업래로 만드는 게 아니라, 무슨 촬영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떻게 세계와 인간이 그렇길래, 다이오의지까지 부정되어 버린 것일까, 여기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부파는 이해가 더 많이 필요한 거죠. 이 두 단어가 있는 게 아니라, 마찬가지로, 다이오의지 속도, 다이오의지만 단위적으로 남는 게 아니에요. 어떤 사람이 다이오의지를 얘기할 때는, 다이오의지가 필요한 인간관이란 뜻이고, 세계관이라는 뜻이고, 그러한 인간이 그러한 세계를 살아갈 때, 그렇게 이 문제를 생각하니까, 다이오의지도 필요해지는 겁니다. 이 두 개의 계획은, 표면에 있는 두 단어나 개념의 싸움이 아니라, 이것들이 담고 있는, 세계관의 싸움입니다. 어떤 느낌인지 아시겠죠? 그 세계 속에서 다이오의지가 필요합니다. 다른 철학과 다른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 속에서, 다이오의지가 필요합니다. 이 두 개의 스타일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전체를 포함하고 있는 세계, 인간 전체, 여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것들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마칩니다. 다이오의지가 필요할 때,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지 않아서, 원인이 필요할 때, 원인을 가져오는 것, 다이오의지가 필요해지면, 인간이 필요한 것, 이해가 안 됩니다. 말을 뛰어넘으면 맞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원인을 가져오는 것, 다이오의지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원인이 아닌 것을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그것을 들어야, 보기 아니라, 원인이 아닌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보시죠.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것도 그냥 원인을 가져오는 것, 그런 것들의 의지는 스티머단이 얘기합니다. 그런 것들의 의지는 스티머단이 얘기합니다. 그런 것들의 의지는 스티머단이 얘기합니다. 하지만 자유의지는 다릅니다. 하지만 자유의지는 다릅니다. 그래서 자유의지와 의지의 차이는 그래서 자유의지와 의지의 차이는 그래서 자유의지와 의지의 차이는 대부분의 의지는 자유의지라고 생각해 보시면 되고 대부분의 의지는 자유의지라고 생각해 보시면 되고 대부분의 의지는 자유의지라고 생각해 보시면 되고 대부분의 의지는 자유의지라고 생각해 보시면 되고 다른 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자유의지를 부정하지 않는 이상은 특별히 자유의지를 부정하지 않는 이상은 특별히 자유의지를 부정하지 않는 이상은 의지가 필요하다고 얘기할 때보다 다릅니다. 의지가 필요하다고 얘기할 때보다 다릅니다. 그런데 스티머단은 자유로운 의지를 찰떡이 부정하는 대신에 그런데 스티머단은 자유로운 의지를 찰떡이 부정하는 대신에 그런데 스티머단은 자유로운 의지를 찰떡이 부정하는 대신에 우리의 어떤 의지와 의욕이 느껴진다는 점까지 우리의 어떤 의지와 의욕이 느껴진다는 점까지 우리의 어떤 의지와 의욕이 느껴진다는 점까지 드러나진 않아요. 드러나진 않아요. 드러나진 않아요. 그러나 이게 인간의 작용 속에서 떠오른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게 인간의 작용 속에서 떠오른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게 인간의 작용 속에서 떠오른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게 인간의 작용 속에서 떠오른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게 인간의 작용 속에서 떠오른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게 인간의 작용 속에서 떠오른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게 인간의 작용 속에서 떠오른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게 인간의 작용 속에서 떠오른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게 인간의 작용 속에서 떠오른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게 인간의 작용 속에서 떠오른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게 인간의 작용 속에서 떠오른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게 인간의 작용 속에서 떠오른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게 인간의 작용 속에서 떠오른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게 인간의 작용 속에서 떠오른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게 인간의 작용 속에서 떠오른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게 인간의 작용 속에서 떠오른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게 인간의 작용 속에서 떠오른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게 인간의 작용 속에서 떠오른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게 인간의 작용 속에서 떠오른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게 인간의 작용 속에서 떠오른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게 인간의 작용 속에서 떠오른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성사의 기반을 예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에베동산, 아당과 이소가 살고 있는 에베동산. 남성, 아당 쪽의 성기가 다르게 움직인다. 에베동산에서는 아당의 성기도 이렇게 움직였다. 성기는 우리가 의견적으로 움직이지 못하잖아요. 그게 남성이 좋은거에요. 에베동산에서는 아당이 그렇게 했다는거에요. 그렇다고 보고 하는게 아니기 때문에 떠오른거죠. 예를 들면 그렇게 자기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성기였는데 자기 자유자재로서는 선아빠를 먹고 이고 때리고 부끄러워서 다리 벌리고 나오잖아요. 하느님이 영령을 받았고, 하느님이 에베동산에서 쫓아낸거죠. 천국이나 에베동산에서 쫓아났으니까 그때부터 대화, 거래를 하는게 우리 인간 모두의 성기였어요. 원조가 그런거죠. 그러면서 에베동산에서 쫓아나면서부터 내 몸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성기가 생긴거에요. 성기처럼. 자기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시대가 있었지만 원세 이후에 타락한 결과로 자기 자유자재로 못 움직여요. 여기가 나고있을 때 너무 힘듭니다. 자기 자유자재로 못 움직이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그게 남성으로 치면 성기에 치면 발리가 되잖아요. 흥분을 받으면 나도 모르게 컨트롤 할 수 없이 발리가 되잖아요. 이게 왜 신의 버릇이냐면 내 몸에 내가 원하는대로 움직일 수 없는 어떤 부위가 들고 일어나는거죠. 이 들고 일어나는게 바닥이 신에게 들고 일어났던 것과 같다는거죠. 귀한 것들은 공기로 늘어나는거죠. 저 하나가 들고 일어나는거죠. 신의 버릇은 이런거에요. 너희가 나의 말만 듣지 않고 너의 마음대로 했으니까 이제 나는 너희 몸에다가 너희가 어째할 수 없는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을 주겠다. 그게 이거에요. 재미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항상 이런거에요. 남성이 흥분을 해서 성기가 발리에 탈 때마다 자신의 자유를 떠올리게 되는거에요. 이게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처럼 그때 우리가 하느냐의 말씀을 어필했고 마음대로 움직였었구나. 그거를 상대하는 의미에도 신이 없는거에요. 이게 바닥이 들고 일어난다는거죠. 여기서 생각하면 내 자신을 성적으로 탈출할 수 없으니까 지금 떠오르는거 아니에요? 정확하게 비유를 합니다. 요의로 비유를 할 수가 없죠. 그래서 이렇게 같은것처럼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딱 말씀하신것처럼 문제나 생겨요. 이렇게 얘기를 해서 신의 버릇을 설명을 했는데 반대로 말하면 당연히 기독교 유지니까 성행리가 이 문제나 되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흥분을 해서 성성하게 뱉게 되었다고 하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아니라 정확하게 내 책임이 아닌거죠. 그쵸? 그러면 누가 충분히 하게되면 아 그게 제가 원래 사는게 아니라 이렇게 뱉고 버렸는데 또 사람이 버린거에요. 피해가 됐네요. 당연히 사람가로서는 이렇게 고민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해서 훌륭한 설명을 배웠는데 이건 어떻게 비유를 할 수 있지? 이건 못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면 반대편에서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부위를 다시 명안에 넘어오는거죠. 그게 뭘까요? 자유입니다. 자유입니다. 자유입니다. 그래서 이런거에요. 우리 안에는 이 이력서와 같은 것처럼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욕망이 있어요. 성적이 문제라면 성욕이 있겠죠. 그렇잖아요.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성욕이 있는데 성욕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게 있는 만큼 반대편에 마음대로 원하는대로 컨트롤 할 수 있는것이 없는거에요. 욕망이 있지만 욕망이 다 행위로 이어지지 않잖아요. 욕망이 있는 것에다가 자유의지가 접붙여 줄 때 욕망이 그려져요. 현실이 그려져요. 행위가 그려져요. 그러면 내가 얻지 할 수 없는 욕망의 틈이 우리 몸에는 있지만 이것이 현실적인 행위로 이어지는 것은 그 자체로는 불가능하고 자유의지가, 나라는 의지가 여기에 욕망에 동참할 때 행위로 이어져요. 그렇잖아요. 만약에 동참해주지 않고 찾았으면 행위가 안될거잖아요. 그런데 동참해서 의지가 끼어들어서 행위로 실현을 시켰으니깐 문제가 없잖아요. 이 생각을 탐색할 수 있어요. 우리 안에 얻지 할 수 없는 욕망이 있는 것도 많고 원자실에 생긴 것이 많아. 하지만 그것이 현실적인 행위로 일어날 때는 자유의지의 도움과 역할 덕분에 됐으니까 실제 어떤 행위와 문제가 생겼다면 이게 있으니까 행위로 이어지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게 아주 자유의지 갖고 있는 세계관과 인간관을 잘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 더 말씀드리면 우리가 얻지 할 수 없는 욕망, 본성 이런게 있잖아요. 즐겁고 자유로울 수 있는 쌍둥이 같아요. 동시에.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어떤 존재를 반으로 갈라서 분해를 시키는 거예요. 분해를 시켜서 얻지 할 수 없는 부분 하나 우리가 원하도록 할 수 있는 요소 하나 따로따로. 그러니까 이 두 가지는 동시에 통합이 돼요. 대립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일어나면 욕망을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거니까 대립을 하는 게 어떤 대립을 따로 만들어 주는 대립이지. 쌍둥이는 동시에 통합이 돼요. 그러면 거기서 볼 때 자유의지와 욕심 사이에서 보면 욕심은 부정적인 거, 안 하는 거. 욕심은 부정적으로 됐는데 안 하는 거. 그게 자유의지고 그냥 욕심은 분변되는 거, 부정적인 거 다 되는 거. 그러니까 내가 뭐라고 해야 되겠다. 욕심도 안 해야지. 담배도 끊어야 되겠다. 이 두 가지가 합성된 거. 지금 설명했던 자유의지는 정상하지 않는 걸로 일어났는데 더 적극적으로 선한 행위를 하려고 하면 자유의지가 필요하구나. 이 자체가 부정적인 건 아니고 긍정적인 행위에서 하는 것도 자유의지고 어떤 욕망을 낳는 것도 자유의지. 이렇게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대중의 지루한 사회에서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결국에는 자유의지를 포기하는 길이 기독교의 목표예요. 자유의지를 포기함으로써 자유의지가 없으면 우리는 어떤 거에 외쳐나갈 수 있을까요? 기독교에서는 신의 의지에 완벽하게 따르기 위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자유의지를 내 자유의지로 포기나서 내려놓는 게 필요해요. 내려놨을 때 신의 의지에 온전히 닿을 수 있게 되니까 그걸 내놓는 게 필요해요.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믿음을 쌓을 때 자유의지가 쌓았다는 거군요. 그래서 그냥 믿기만 하면 그건 대중적으로 동적을 쌓아야 성국에 간다. 그런 대사를 배울 수 있다면 선지도 쪽과의 비교가 달라요. 지금 하는 얘기는 다 되겠지만 시대적으로는 대중적 의전이 있지. 로만 속이와 속이 계속 되니까 그때는 대중적의 남성이잖아요. 또 남성 합당받아서 이유는 다르기도 하고 기본적인 얘기는 우리한테 어쩔 수 없는 로만 속과 그러니까 컨트롤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함께 생겨서 만들어졌다는 거죠. 이 이론이 생겨서. 신을 납득이 되는 이유는 이 안에 있죠. 그런데 신의 의자는 이 세계 자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게 나아집니다. 페이지 조금 넘겨주실까요? 여기서 조금만 이해해 주시면 돼요. 그래서 이 성적 속과 이것을 통제하거나 억제하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뜻은 이간의 모델을 정신과 입체 사이로 이분법 시키면 안되고 명령밖에 안됩니다. 그래서 이런 쪽이 실제 역할을 하겠죠. 어쩔 수 없는 부분. 이런게 정신이나 이성의 역할을 하는 거죠. 그러면 정신의 명령에 의해서 실체를 컨트롤 할 수 있다는 것이 명령이나 기대 신체 쪽에서는 복통 복통하지 못한 이런 것들을 이루는 것이죠. 이런 아픔을 이루는 것은 다 자유의지라는 개념 속에 포함되어 인간관이나 생계만을 이루는 것이죠. 인간이 그걸 나누기 시작하는 것이고 그런 것들은 대체로는 신체와 정신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럼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정신의 명령에 의해서 신체를 움직입니다. 이런 말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유의지를 구성하려고 한다면 이걸 다 구성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아마 우리가 이해가 힘든 점은 자유의지를 구성하겠다고 하고 이런 것을 버리기 쉽지 않습니다. 내가 팔을 드는데 정신이 팔을 들어 명령에서 실체를 드는 것 말고 뭐를 생각하는 것일지 여기까지 뒤집을 수 있을까 이런 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렇죠? 그래서 친구들에게 궁금하시겠죠? 당연히 이걸 구성하지 않습니다. 이걸 구성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신체는 정신의 명령에 의해서 움직이는 게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면 신체와 정신은 어떤 관계냐 하면 신체로서 한다면 성행동으로서 관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성행동 자체가 비슷한 것은 아니겠죠? 더 다르게 말하면 명령이란 줄 아시나요? 명령 기준이 이런 거잖아요. 정신 속에서 먼저 품각이나 뭔가 떠오르면 그거를 신체에 전달을 해서 어떻게 해라 이런 명령이 있겠죠? 명령은 동시에 같이 움직입니다. 두 가지가 서로 연동되어 있습니다. 정신 속에서 물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똑같이 동시에 신체도 같이 움직입니다. 그러니까 연동이 있다. 명령 집에 가자. 오히려 함께 커뮤니케이션을 합니다. 같이 연동되어 있습니다. 물론 있어도 하거든요. 약간 난점들이 있어요. 정신이 먼저 했는데 안 움직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있어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정신에서 마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몸을 움직일 만큼 마주하고 싶다는 관심은 크지 않거든요.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같이 연동될 때에는 팔을 들죠. 우리는 팔을 들어야 된다는 생각이 이어져서 근육을 움직여서 팔이 든다고 생각을 하지만 실제는 팔을 들어야 된다는 생각과 팔을 뗄 때도 등을 생기는 정신이 다릅니다. 성우와 명령과 인간의 움직임이 다릅니다. 이렇게 생각해요. 이쪽은 이쪽때문에 문제가 있어요. 신체가 정신의 명령을 누리잖아요. 어떻게 명령을 누리면 정신은 만두지나 물체만 형체가 없어요. 생각이 꾸이는 거죠. 생각이 꾸이는 건데 신체라는 물체를 어떻게 움직일까요? 대사를 쓰면 이쪽이 있잖아요. 이 두 가지의 명령을 연결하는 부위를 따로 만들어요. 통과선이라고 하죠. 뇌 안에 통과선이라는 부위가 있어서 이 부위가 정신의 명령을 받아서 신체를 움직이는 컨트롤 센서죠. 하지만 이렇게 맞추면 없어요. 통과선은 정신인가? 생신인가? 그렇죠? 두 개를 연결해서 바라보는 탄력으로도 있는데 얘는 정신인가? 생신인가? 세 개의 두 가지 밖에 없잖아요. 중복해서 없잖아요. 근데 여기가 만두지나 물체입니다. 이런 문제들이 있었는데 스티로사는 이 전체를 조정하면서 연구를 하게 되는 겁니다. 요즘 스티로사의 생각은 심신평행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티로사는 그렇게 얘기해요. 스티로사가 이렇게 얘기했을 때 많이 공격을 받았거든요. 동시에 움직이는 다른 움직임이 없다고 합니다. 이런 문제를 붙여요. 장난이 한 마리 있는데 그 장난이는 배도 고프면서 목도 낮아요. 똑같은 수준으로 배도 고프고 똑같은 수준으로 갈증도 나고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식량, 음식이죠. 왼쪽에는 물. 똑같은 거리. 똑같이 갈증과 똑같은 배가 고파요. 어떻게 움직일까요? 자유의지가 있는 쪽은 원인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고 의지로 행위를 할 수 있는 거죠. 똑같은 수준으로 갈증과 고프가 있고 똑같은 거리에 건초와 물이 있으면 장난이 결정할 수 있어요. 자유의지가 있으니까요. 인간적으로 나뉘는 거죠. 그 중에 고민하나가 한쪽 가서 술을 먹는 거죠. 그걸 스스로에게 물어봐요. 너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했으니까 원인에 의해서 결정되는 거죠. 만약에 똑같은 수준에서 건초와 술로 갈증을 갖고 하면 똑같은 거리죠. 배고픔과 갈증이 똑같은 수준이라면 한쪽이 타면 그렇게 되겠죠. 똑같은 수준이라면 어떻게 하는 거냐? 스스로가 밥을 굶어 주는 거예요. 왜냐하면 실제로 그런 일이 없잖아요. 탈모 자체는 조금 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걸 도전하는 입장에서 괴롭히는 우리가 없는 거죠. 실제 그런 밥은 도전하지 않습니다. 정말정말 그렇다고 하면 당장은 굶어 죽이고 싶다. 이렇게 하는 거죠. 웃음이 있어도 되겠지만 우리 일상에서 의외로 많아요. 선택장애? 요즘 그런 용어 많이 쓰잖아요. 짜장면, 짬뽕, 비빔면 못 고르겠어. 둘이 선택이 없어. 저한테 쎈 버릇을 받아요. 그러니까 싫어하는 그런 것을 불합리한 돈으로 옹호하면서까지 이 세계를 지키고 싶은 거죠. 이 세계만 있는 것 속에서 이런 세계를 만들고 싶어 하는 거죠. 그렇죠? 조금 더 내용으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밑에 표를 조금 보죠. 간단한 비유를 좀 했습니다. 살짝 보도록 하죠. 윤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만약에 윤리라는 것은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다. 그렇죠? 그 중에 있는 것 중에 조금 더 좋은 선택을 하는 것이 윤리다. 올바른이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유명한 게, 그런 거 유명하죠. 한 번 더 물어볼 수 있는 게 있는데 정차가 오는데 길에 찬 사람이 묶여있고 내가 다른 사람을 밀어서 이 사람을 구할 수 있다. 이런 윤리적 퀴즈 문제로 하는 겁니다. 원래 잃은 사람을 구할 것인가 다른 사람을 죽이고 이 사람을 구할 것인가 이런 퀴즈를 나누는 거죠. 이렇게 물어보는 것 자체가 윤리라는 게 순간의 결정적인 선택이란 감정이 살고 있는 거죠. 인생을 살면서 어떤 선택을 하는데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윤리다라고 하는 전셋이 살고 있습니다. 그건 다 다이오니티의 개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뭐 가끔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헐리우드 영화 같은데 보면 재난영화 이런 걸 볼까요? 재난영화 하면 이런 컨셉팅이 많이 나와요. 그렇죠? 뭐 기진이나 화산이 틀어져 이런 상황에서 가족을 지킵니다. 다른 사람을 지키려면 윤리가 자신이 살아야 되거든요. 헐리우드 영화니까 대충 그림이 그려질 수도 있어요. 그 남자 주인공은 가정을 지키는 우리 가족과 관련된 헐리우드 남자는 그러니까 영화의 초반 구간에 이 남자는 아내와 엇갈린 관계여야 될까요? 계속 이와 같이 살아야 돼요. 이혼하고 알코올 중독에 삐져나간 남자가 대낮에 돌아갈 수 있다.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이 나오잖아요. 그러다 결정적인 순간에 뭐 사람도 좋아하든 가족을 좋아하든 이러면서 이제 이 전체 재난영화가 마무리되는 거죠. 그렇죠? 세우다 거론으로 비판을 해보다면 왜 처음 이혼했냐는 거예요. 그렇죠? 그렇게 어떤 윤리적 균형화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가족을 선택함으로써 가족이 우리가 살아난다는 것은 결혼 선택이 있기 전까지는 가족이란 사람이 없다는 뜻이에요. 진작부터 가슴팍이 계속 일어나지도 않았어요. 이게 무슨 느낌인지 아시죠? 그림을 그릴 때 윤리적 선택의 요령이 있다. 아주 결정적인 순간이다. 잘 선택해야 돼 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실패예요. 좋은 삶은 이러한 선택에 내몰리지 않습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우리는 윤리를 가위바위보의 개념으로 봤을 때 지나치게 순간의 결정적인 선택으로 생각하는 윤리가 있어요. 실제 윤리는 삶 전체의 플러그에 살아보는 가족입니다. 그 할리우드 재난영화의 주인공 재난이 끝나고 가족의 삶을 믿겠어요. 재난이 다 끝나고 평화로운 곳으로 돌아갔잖아요.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사실 좀 아쉽잖아요. 그러나 상황 속에서 돌아다니니까 표현을 이상하게 보기에 전혀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대신에 표현을 생각하는 윤리는 순간의 선택이 아닙니다. 자기 완성으로서의 윤리입니다. 매 순간 자기 자신을 조금 더 완성시켜 나가는 것을 윤리로 생각하세요. 선택하는 것. 그래서 자기 완성이 그 반대쪽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조금 더 완전한 존재로 만들어내는 과정입니다. 삶이 더욱 자기 자신에게도 완수되도록 해나가는 그 과정이 윤리라는 것입니다. 재난 터지기 전에 살아라. 이 정도예요. 보통 사람들은 그런 것의 일반성을 잘 모르고 아주 중요한 순간에 뭘 한 것처럼 했을 때 삶이 되게 크게 의미 있는 거라 그런게 더 유명한 것 같아요. 그래서 자기 완성이라는 것이 아마 뒤에서 조금 더 얘기하겠지만 표현하자 얘기를 들으면 능동적인 삶으로 이어집니다. 이따가 능동적인 삶을 한 번 해보도록 하죠. 그러니까 자기 삶을 더 자기 자신들로부터 나오도록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지금 계획은 우리 감히 인간에 한 번 이방인이라는 소설을 다룰까 한다고 합니다. 감히의 커블레이션? 지금 생각나면 우리 팀 8강이잖아요. 7강이나 8강제 종료의 뒷부분에 가서 이걸 한 번 다룰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삶과 행위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무엇인가 팀원한테 얘기했을 때 능동이나 윤리로 돌아가고 싶다. 하나씩 나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능동은 의지가 들어가야 되잖아요. 아 그러니까 의지적 능동이 아닌 거죠. 의지가 없으면 의지적 능동이 아니에요. 탈레반에 들어간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능동은 능동같이 의지가 들어가야 되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그 능동이 의지적 능동입니다. 이런 능동을 가야 돼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뭐 쉽지 않으시면 천천히 읽어보시고 그때에 대해서 얘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 다음에 인간이라는 존재도 다르게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자유의지적이었잖아요. 자유롭거나 자유의지가 있는 부분과 자유롭지 못한 부분도 분련되어 있어야 돼요. 그렇죠? 그러니까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들을 내가 뭔가 통제하거나 업로드 했을 때 결제와 유의가 완성이 된다는 거죠. 이미 분리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통제에서 벗어난 부분에 대한 통치, 지뢰, 명령이라는 제도가 필요합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정신과 핏대의 관계들이 필요하다는 거죠. 완전히 필요한 쪽은 인간이라는 자기가 자기의 성장에 나가는 존재 여기는 분련되는 존재 아까 말씀드렸죠? 자유의지와 이런 성적이란 것은 쌍종이로 태어났다. 쌍종이로 태어난 게 아니라 대립되어 있긴 해도 같이 태어난 게 있습니다. 이게 없으면 얘도 없는 거예요. 이 관계 속에서 안정적인 관계는 방에서 태어나서 성욕이 없다는 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어떠한 욕망이라는 게 내가 도저히 컨트롤할 수 없는 무언가의 외부성 따로 있지 않아요? 그렇게 됩니다. 사실은 이 대립같은 것은 쌍종이로서의 대립이라고 아시겠죠? 대립이라고 하는 것 중에 두 가지 버전이 있는데 이렇게 서로 다른 건데 묶여있고 동시에 필요한 대립이라는 게 있어요. 반대로 또 하나의 대립은 뭐라고 할까요? 게시타이트 대립이라는 것도 있어요. 게시타이트 대립이라는 것도 아시죠? 그런 대립도 다 봤는데 간단한 대립이 이렇게 됐어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 오리와 토끼 물론 찾아보시면 더 잘 나와있습니다. 어떤 대립입니까? 오리기냐 토끼냐 고를 때 오리기가 토끼예요. 그런데 게시타이트에 통해서는 오리와 토끼가 동시에 보이지는 않아요. 오리라고 볼 때 토끼가 보이지는 않아요. 토끼라고 볼 때 오리를 볼 수는 없어요. 정확한 대립입니다. 이 대립이 어떤 대립이냐 하면 똑같은 그립인데 한쪽에서 관점을 볼 때 다른 쪽으로 없어지는 대립이고 다른 쪽으로 볼 때 다른 쪽으로 사라지는 대립입니다. 이런 대립입니다. 자유의지가 있는 세계와 자유의지가 없고 자기 활동성도 높은 세계가 이런 대립입니다. 똑같은 세계인데 우리 애들끼리 싸운 게 있잖아요. 자유의지의 시간에서 보면 오리가 보여요. 그렇지. 자유의지가 있긴 필요하지. 그런데 똑같은 세계를 다른 것들에서 보면 다르게 보여요. 이런 대립입니다. 이 대립을 동시에 지지하기가 힘듭니다.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지요? 이런 거는 다르잖아요. 아 이게 이게 있네. 하지만 이건 같은 시기입니다. 같이 만들어진 겁니다. 이런 대립처럼 하나의 세계를 무너뜨려야 가는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죠? 아마 이런 거를 처음 보셨을 때는 못 찾는 정도였을 거예요. 저도 토끼를 먼저 봤나 오리를 먼저 봤나 반대쪽을 처음에는 잘 안 보였는데 계속 보니까 이게 되게 많이 바뀌는 거예요. 그 정환 정환이 여기만 넓이 타고 있는 거죠. 그래서 누군가는 자유의지적으로 생각하면 자유의지가 보일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보기 시작하면 이렇게 보이는 세계도 나오는 거예요. 그렇죠? 자 그런 것처럼 인간도 태어납니다. 저도 빨리 해야겠네요. 자 천하도 마찬가지입니다. 윤리가 천하세계라고 생각했으니까 자유의지적에서는 천하지가 위치지. 모르는 선택 나쁜 선택 천하이지 않으면 됩니다. 하지만 자기 활동성의 세계에서는 실제는 천하는 구분이 없으니까 천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 세계 세계 자체의 천하가 없기도 하고 따로 천, 악이라는 게 없기도 하고 희로가복이 윤리적으로 그걸 필요하지도 않아요. 물론 희로가복의 천하이라는 용어를 안 쓰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게 세계 자체의 실체적으로 따로 천과 악이 있다기보다는 내가 자기 윤리 자기 완성을 해나가는 쪽에서 도움이 되는 것과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 있어요. 도움이 되는 것은 천하라고 부르자 도움이 안 되는 것은 악이라고 부르자 이런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는 천하가 없는 게 윤리입니다. 인간관에서 세계방법에서 얘기를 하는 겁니다. 올 프로그램이 일체적으로 따로 있다. 이런 것이 올바른 것이냐라고 고정하게 될 때는 이 세계를 따로 없애야 돼요. 그러니까 자유의지를 조작한다는 뜻은 세계에 있는 천, 악도 없애야 된다는 뜻이에요. 천과 악도 없는 거죠. 윤리적 변화 외부에 있는 따로의 선을 가감하는 다이오지기 때문에 윤리적 존재가 된다는 뜻은 그 선에 가까워진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발전이라는 게 있어요. 나아진다, 좋아진다 그래서 발전을 조작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기에는 이 발전이라는 게 가슴이 큰 거에요. 왜냐하면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고 할 때 의지와 목표를 내잖아요. 나은 사람이 되겠다고 할 때 그러면 지금은 어떤 거로 될까요? 낙도가 좋지 않은 게 될 거잖아요. 자기 조정이 된다. 스튜디오의 생각은 더 훌륭한 사람이 되는데 자신이 훌륭한 게 되나? 그렇게 물어보잖아요. 유지 얘기를 많이 불좋아하지고 피가 높으시는 거는 이런 존재일 거에요. 비전이 약간 만족스럽지 않은 거에요. 나쁜 삶인 거죠, 안 좋은 삶인 거죠. 이런 것도 못하고, 저런 것도 안되고 내가 마음에 들어서 못하고 자세가 나쁜 놈이 돼요. 그러니까 더 그런 것들에 달할 수 있는 존재로 나아가고 싶은 거에요. 그럴 때 다이오지기로는 이런 목표를 그리는 거에요. 지금의 상태에서 더 나은 상태로 정환이건 변신하고 싶은 거에요. 그런데 이거는 이 말 자체로 여기를 구성하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현재의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걸로는 결국 여기로 갈 수가 없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렇죠? 능동구성 말씀드렸죠? 그래서 피노다를 공부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능동구로 되어있어요. 그런데 그럴 때 말하는 관계가 있는 것은 지금이 희번덕이라는 거에요. 능동구라는 거죠. 그럴 것도 아니죠. 이렇게 생각하는 것들 자체가 능동구할 수 없다는 거죠. 그냥 능동구 그렇게 되는 게 아닌 거에요. 지금의 나의 삶을 외면하거나 나쁘게 구성해서는 결코 발전이 될 수가 없는 거죠. 그러니까 이러면 정환이 아닌 거에요. 유리적 삶을 이긴다는 것은 자기의 완벽한 능동구였죠? 자기를 조금 더 만들어가는 것이 꿈이에요. 선 악이 있고 어떤가가 도와주는 힘이 아니라 그 자체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것밖에 없어요. 그러면 나은 삶이 나중에 등장해 버리는 것이지 그렇게 목숨을 쌓아서 일어나는 게 아니에요. 이해하실지 모르겠네요. 물론 당연히 더 운동, 더 수동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게 수동과 능동을 유본법으로 갈라지게 되는 것은 아니죠. 지금 우리의 존재는 모두 다 일정한 부분의 능동이 일정하지 않은 힘이 수동이에요. 여기 안에서 조금 더 능동수로 올라가라는 걸 가하는 거죠. 조금 더 수동으로 떨어지는 것도 가능해요. 하지만 지금은 수동 상태, 저기는 능동 상태, 저기로 가야죠. 이 기도 상태로. 그럼 오히려 해야 할 것은 지금 내가 이루어지고 있는 이 낙조발전 수동 수동을 이해하는 이유 밖에 없어요. 수동 자체를 증정하는 것밖에 없어요. 그래서 저기에 더 나은 삶이 일어나는 거죠. 이건 완벽하게 기독교적 모빌이에요. 처음부터. 물론 당연히 다 다른 것 아닙니다. 있어 뒤에 다른 행사는 다른 것들이 있고 성인도 나오는 거네요. 하지만 수련할 다른 길이 남아요. 적이 뭐가 있지 않아요. 수련을 공부해서 나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이해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윤리적 변화라는 것도 실태적 턴, 좋은 상태를 과장해서 거기로 나아가는 거고 그런 것이 아니는 거죠. 그건 자기 부정을 선호할 수밖에 없고 그걸로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거죠. 그래서 지금의 기후하고 안 좋아 보이는 삶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다른 편이에요. 저기는 없는 것입니다. 불교에 대해서 얘기 많이 합니다. 불교에서는 태가 뭐라고 할까요? 태탈? 태탈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죠. 그렇죠. 태탈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죠. 태탈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죠. 태탈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죠. 그렇죠. 그렇죠. 질문 받는 건 좋은데 진도를 좀 나갑시다. 질문은 조금 나중에 하시기 바랍니다. 진도가 다는 못 나가요. 자기 삶을 완성을 이룬다는 뜻은 내 행동에서 내 힘이 표현되는 게 많아진다는 뜻이에요. 내 힘과 나의 활동으로서 하는 부분도 많아진다는 뜻이에요. 어떤 일을 할 때 내 힘과 나의 활동성을 조금씩 더 표현되려고 하는 거예요. 다른 쪽의 힘을 하는 거예요. 이때로 선의 강제성이 있어요. 강제적으로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내 속에 있거든요. 다르지 않나요? 그렇죠. 다르지 않습니다. 오해를 할 수 있는 강제성이 있는 거죠. 이 강제성을 얼마나 현실화, 실현시킬 것인가 라고 하는 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는 강제성을 인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고 있는 게 그 정도일 뿐이에요. 저는 비교를 다루겠습니다. 불교적 비유만 들어볼게요. 모든 인간이 불성이 있다. 이런 얘기를 많이 들잖아요. 불성이 있다는 것은 이 두 가지 부분을 다 얘기할 수 있는 거예요. 어떻게 생각하냐는 문제예요. 불성이 있다는 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불성이 있으니까 강제적으로 불타오르는 어떤 영혼을 가지고 있다. 그걸 실현시키다. 하는 것도 가능해요. 하지만 이쪽으로 오면 그런 의미의 불성을 없어요. 모든 존재의 이미 불서가 있는 거예요. 불성에서 불서가 되는 게 아니라 이미 우리의 삶은 어느 부분, 일정 부분의 존재 일정 부분의 불서가 이미 자기만 모르는 거예요. 그 불서의 부위를 늘려가라는 말을 생각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것이 불서가 있는 것과 모든 것이 이미 불성이 있다는 그 부분에서 불서가 있는 거예요. 그 불성이 있는 부분. 열심히 노력해서 불서가 되어야지 하는 이런 아이디어예요. 불교까지도 잘 읽을 수 있는 책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여자들이 가능한 책. 어쨌든 단대성에 대한 문제는 조금 있어요. 그래서 학원에서 늘 단대성이 있는 거예요. 보통 선생님은 그 안에 부모님이 오셔서 우리한테 단대성이 있는데 학원에 대해서 얘가 읽고 있다는 얘기예요. 애가 공부할 건데 얘가 무슨 단대성이니. 부모님이 읽을 수 있는 거죠. 애가 능력이 있는데 노력을 안 한다고. 노력을 좀 깨워서 편집할 수 있을 때. 그러면 몇 등급에서 2등급으로 될 겁니다. 정확하게 맞는 얘기예요. 그만큼 절박하고 절실할수록 이쪽이 이루어지는 게 쉬워요. 자, 그 다음에 윤리력이 못하는 경우 당연히 의지 부족이죠. 의지가 바닥을 가고 노력은 부족하다. 이건 어떻게 이어지느냐 하면 죄책감 자체로 이루어져요. 그리고 남에 대한 문제로 보면 남이 노력을 안 했기 때문에 원망하는 마음이 생겨요. 그러니까 죄책과 원망 죄의식이 일어나는 과정에는 자유의지용이 상당히 살려져요. 안 할 수 있는데 의지대로 했다고 하면 그렇다는 이유는 생겨요. 보통 지하철에서 지하철에서 누가 위에 발을 밟았다 생각해보세요. 저 사람이 안 밟을 수 있는데 일부러 밟았거든요. 의지가 선택이 있어요. 화가 엄청나게 났겠죠. 빠져들겠죠. 하지만 그 사람도 뒷살대에 밀려 밀면서 발이 움직여요. 라고 생각만 해도 화가 좀 가라앉어요. 자유의지는 책임을 쉽게 이룰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마음의 자책과 원망하는 마음은 크게 일어나지 않아요. 하지 않은데도 원인이 없는 해석이 됩니다. 그래서 자유의지. 자, 이쪽은 삭제의지. 운종기관과 세계적인 의지인데 운종기관과 관련해서 세계관과 관련해서 말씀드린 것은 자유의지도 세계적인 일부라는 것이 때문입니다. 자유의지는 원인이 없는 의지예요. 그래서 운종기관과 관련해서 음... 이런 세계에서는 세계는 대부분 정직이 있어요. 정직이 있다가 이따듯이 운동을 하는 거죠. 가만히 서 있잖아요. 이렇게 움직이는 거죠. 이런 모델인데 정직에서 운종으로 가려면 논리적인 문제는 없습니다. 정직에 있다가 갑자기 움직일 수가 없잖아요. 움직이려면 원동력이 필요해요. 정직의 물체를 충격을 가해줘야 움직이고 자라는 건 아니에요. 충격을 가해주는 원동력이 필요해요. 이 세계는 기본적으로 정직하다가 운동으로 변화하는 거고 원동력이라는 거죠. 이게 똑같이 인간 버릇이라고 보시면 돼요.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잖아요. 가만히 있다가 행동을 하죠. 원동력을 느껴야겠죠. 운동을 일으켜주죠. 이게 다양한 문제예요. 어떤 행동을 추동하는 모티브가 필요해요. 하지만 행동자의 세계에서는 정직과 운동이 구분되고 나누어지는 게 아닙니다. 자기 활동도 말씀드렸죠. 중간에 스킹이나 수영도 말씀드렸을 거예요. 가장 빠르게 운동할 수 있는 동작이 있는 동작이에요. 운동과 정직은 분리되는 게 아닙니다. 이거는 갈릴레오 이후의 근대 물리학이 가능합니다. 반대로 그런 거잖아요. 운동하고 있는 물체는 계속 운동하려고 하고 정직이 있는 물체는 계속 정직하려고 한다. 정직을 말한다고 해서 이중이 아닙니다. 정직하려고 하는 물체는 계속 정직하려고 한다. 하려고 한다는 운동성입니다. 그런 사람이 정직에 있는 물체를 건드리지 않고 다 나가지 않는다. 그렇죠? 이중이 있는 정직에 있는 걸 건드리지 않고 다 나간다는 거죠. 실제로 물리학적으로 보니까 밀어도 안 밀 때가 있는 거예요. 저항감이 있죠. 정직에 있는 거는 정직에 있으려고 하는 운동성이거든요. 반대로 운동을 시작했으면 이제는 운동하는 것들은 계속 운동하려고 하니까 운동을 더 이상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당연히 운동하고 있는 거예요. 하늘의 상태가 움직이잖아요. 바위가 조금씩 돌고 지구도 조금씩 돌고 있죠. 운동의 출발점이 있나요? 이거는 출발점인데 구원을 물어보는 거거든요. 이 상태는 운동을 시작하는 순간 계속 운동하려고 하니까 운동의 출발점이 계속 움직여요. 그게 기초세계입니다. 운동과 정직은 이무색적으로 구분되는 세계가 아닙니다. 그게 갈릴레오의 근대 혁명이고 과학혁명이고 인간세계는 운동과 정직을 구분하는 세계입니다. 이 때는 운동을 이렇게 이해를 했어요. 마우스가 날아가면 저절로 운동을 계속하는 게 아니라 날아가는 순간 앞에 공기가 있잖아요. 뒤로 와서 다시 밀어줘요. 밀어주고 밀어주고 밀어주고 이렇게 운동을 해요. 왜냐하면 이 막판 안에 힘을 넣는다는 생각도 있어요. 외곽을 깨고 밀어줘야 되는 거죠. 그게 날아간다는 걸 설명하고 싶습니다. 똑같은 식으로 마우스가 들면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섬위를 할 때도 힘이 계속 들어지고 있다. 제가 팔을 들 수 있는 것도 내가 들려도 들리지 않지만 신이 계속 이렇게 들릴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이 눈으로 봤을 때는 이 세계의 모든 일에 신의 향기와 신의 힘이 끌어오는 거죠. 얼마나 인무식이 낫겠을까요? 이걸 이미 분명하게 생각해요. 여기에서는 저절로 움직이게 나오는 순간 신의 힘이 없어져서 알아서 움직이네요. 이 세계를 가지고 있는 거죠. 그래서 과학, 사학 같은 것도 공부하시면 재미있습니다. 그냥 어떻게 변화했다는 게 아니라 이렇게 세계를 이해할 때와 이렇게 세계를 이해할 때가 다른 거죠. 우리는 현재 살고 있지만 이런 면에서는 힘은 있는 거죠. 등등등 이어집니다. 뭐 이 정도에서 마무리해야겠네요. 이번 세트관은 한번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이오 위치가 있는 게 있잖아요. 다이오 위치가 없이 무언가를 이해하는 거죠. 세계를 읽지 않고 메커니즘을 파악하는 메커니즘이 있습니다. 올해보다 조금 더 늙어지긴 했네요. 다이오 위치가 없어서 메커니즘을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다이오 위치가 없어서 메커니즘을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다이오 위치가 없어서 메커니즘을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다이오 위치가 없어서 메커니즘을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다이오 위치가 없어서 메커니즘을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다이오 위치가 없어서 메커니즘을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다이오 위치가 없어서 메커니즘을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다이오 위치가 없어서 메커니즘을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다이오 위치가 없어서 메커니즘을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다이오 위치가 없어서 메커니즘을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다이오 위치가 없어서 메커니즘을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다이오 위치가 없어서 메커니즘을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다이오 위치가 없어서 메커니즘을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다이오 위치가 없어서 메커니즘을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다이오 위치가 없어서 메커니즘을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다이오 위치가 없어서 메커니즘을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다이오 위치가 없어서 메커니즘을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다이오 위치가 없어서 메커니즘을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다이오 위치가 없어서 메커니즘을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다이오 위치가 없어서 메커니즘을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다이오 위치가 없어서 메커니즘을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다이오 위치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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