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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in ideas from this information are about the passage from the book of Acts, specifically Acts 13:1-12. It talks about the leaders in the Antioch church, their diversity, and their experience of the Holy Spirit's guidance. Barnabas and Saul (later known as Paul) are sent out as missionaries from the church, and their journey begins. The passage also highlights the importance of the church as a community and the need for collective responsibility in missions. It emphasizes the universality of the church and the role of the Holy Spirit in guiding and empowering the church. The passage encourages the church to remain faithful to its mission and to be a light and salt in the world. Prayer is offered for the church, its leaders, and the mission.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신약 성경 사도 행정 13장 1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차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는 시무원과 구련의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로세의 젖동생 마나엥과 및 사오리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바오를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칠루기야에 내려가 거기서 배타고 구부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세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 예수라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그가 총독 석이오 바올과 함께 있으니 석이오 바올은 지혜에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올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배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바올이라고 하는 사올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오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기를 굳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내 위에 있으니 니가 맹인이 되어 얼마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 아멘. 오늘 본문은 안디옥교회가 바올과 바나바를 파송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부터 바올과 바나바의 선교여행이 시작됩니다. 사도행전 전반부에서 베도로가 중심이었다면 사도행전 후반부에서는 바올이 중심이 됩니다. 그 전환점이 오늘 본문의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1절부터 4절 전반부까지 바올과 바나바의 파송을 다루고 4절 후반부부터는 본격적인 선교여행이 시작되며 21장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1절에는 안디옥교회의 지도자들에 대해 다룹니다. 안디옥교회는 이방색에 세워진 교회로 어떤 면에서 예루살렘 교회와 대비되는 교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교회의 영향, 유법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다면 안디옥교회는 이방세계 속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복음의 재해석이 일어납니다. 복음은 늘 새로운 문화 속에서 재해석되고 풍성해집니다. 그런데 안디옥교회의 지도자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나바는 키프로스 출신의 디아스프라 유디인이었습니다. 바울도 파소성 출신이었습니다. 거기에 니게르라는 시문이 있는데 니게르는 검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헤로세 저똥생 만하엔이 나오는데, 저똥생은 어릴 적부터 왕자의 친구로 자라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신분이 높지 않더라도 최상층 권력자와 연결되어 있다 보아야 합니다. 안디옥교회는 이처럼 다양한 이들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가 특정 지역 또는 특정 계층을 넘어 보편성을 띄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교회의 중요한 표지로 보편성을 들 수 있는데 안디옥교회는 그 지도자들만 보더라도 지역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교회였습니다. 이들은 함께 금식하며 기도할 때 성령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성교사로 파송하게 됩니다. 교회의 지도자를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파송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개인의 헌신이 아니라 교회가 함께 감당하는 공동체적인 소명으로서 성교사를 파송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성교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됩니다. 전에는 박해를 피해 도망다니다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찌 보면 상황에 대처하다 보니 수동적으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적극적으로 주님의 뜻을 구하며 능동적으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성교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뜻대로 성교를 이루어 가십니다. 4절부터 바울과 바나바의 여정이 나오게 됩니다. 살라미아 바보에서의 사역을 다룹니다. 이 장면은 바울과 바나바 전도 여행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비록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라 불리지만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 복음에 반대하는 대적자, 거짓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그를 영적으로 제압하는 이야기가 있고 그 과정 중에 로마의 총독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 로마 당국자는 복음에 대해서 다소 중립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이수님이 로마의 반역자로 십자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호의적인 태도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전도 여행이 21장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말씀의 적용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파송은 교회의 보편성에 주목하게 합니다. 교회가 특정 시대, 특정 지역, 특정 대칭에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고대 교회는 무엇이 다른 조직과 교회의 차별성이 있는지 고민했습니다. 그 특징을 네 가지로 대는데 이를 교회의 표시라고 합니다. 그 중 하나가 보편성입니다.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편암되면 병들게 됩니다. 어떤 교회는 대구 출신들이 많은 교회가 있고, 또 어떤 교회는 강남 중산층을 타깃으로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특별히 캠퍼스 선교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구성이 독특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교적 사명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가 보편적인 교회에 속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국 교회 안에 있고, 또 세계 교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살펴볼 점은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기들끼리 선교하고 싶어서 돌아다닌 것이 아닙니다. 이들을 보내는 주체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3절에 안수하여 보낸다는 말의 주어로 안디오 교회가 있고, 또 4절의 보내심의 주어는 성령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개인의 감동에 이끌려 나선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소명을 받아 성령에 인도하신 가운데 선교사를 파송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교회 개척을 하거나 선교사를 보낼 때 대체로 개인의 헌신에 의존합니다. 우리나라가 더욱 그렇습니다. 신학교도 교회가 겉면에서 보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소명을 받아 가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을 개인의 일로 취급하다 보니 결국 교회나 선교의 사유화가 이어지게 됩니다. 종교 1세대의 영웅적인 헌신 이야기가 2세대로 이어지면 선교 재산의 사유화, 교회의 세습으로 끝나고 맙니다. 이는 공동체의 소명을 개인에게 떠넘겼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교회의 일입니다. 함께 주님의 뜻을 구하며 사람을 세우며 그 짐을 나누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의 시작도 교회가 함께 해야 하고 그 끝에도 교회가 함께 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교회가 그 일을 감당할 때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짧은 구절이지만 안디옥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그들이 어떻게 선교를 감당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도수적인 유대인들, 한레주의자들이 점점 늘어난 예루살렘 교회는 점점 약화되었고 교회의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보편성을 지향했던 안디옥교회, 성교를 감당했던 안디옥교회는 오늘날 우리 교회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건강한 교회, 성교적 교회가 되려면 이러한 보편성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공동체의 소명으로서 성교를 감당할 때 하나님께 쓰임받는 교회로 남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안디옥교회처럼 성령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그런 교회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초건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성교적 공동체로 불러주시니 감사합니다. 성령이 이끌리신 대로 보금을 전하는 교회, 함께 마음을 모아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교회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한국교회와 세계교회, 그리고 그리스에 몸된 우주적 교회의 한 부분임을 기억하며 서로 협력하며 연합하는 교회 되게 하시고, 분열한 이 땅 가운데 화해하고 회복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여 주옵소서.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합니다. 한국교회가 세습의 유혹을 벗어나게 하시고 공적인 교회로 서게 하여 주옵소서. 성교적 사명을 회복하며 보금을 전하며 시대의 양심으로 빛과 소금으로 존재하게 하여 주옵소서. 여러 지역과 교단, 교파로 나누어진 교회들이 서로 연합하고 연대하며 주님의 뜻을 감당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에 계신 사명을 위해 기도합니다. 킴버스 성교에 은혜를 더하여 주옵시고 함께 사명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바울과 바나바처럼 우리로 하여금 많은 학생들을 만나게 하여 주시고 보금을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 성교센터 끝들에 복 내려주시고 기독 공동체의 인큐베이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성교 수련장 가운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여 주옵소서. 성경부를 기억하여 주시고 저들 앞에 놓인 결혼과 취업, 진로의 문제를 넘어서게 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세워지게 하여 주옵소서. 앞으로 10년 후 20년 후 한국사회와 세계 속에서 쓰임받게 하여 주옵소서. 장년들을 기억하여 주시고 육신의 질병 가운데 고통받는 자들을 극리를 하여 주옵소서. 정신적으로 어려움 겪는 자들에게 평안을 허락하여 주시고 일상의 자리에 복 내려주시고 가정과 직장에서 그리고 학교에서 빚과 소금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가정의 불화로 어려움 겪는 이들에게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대화가 다시 시작되게 하시고 소통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홀로 사는 이에게도 주님 함께 하여 주옵소서. 주님 앞에 나온 권속들, 온라인으로 참여하는 성도들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더 풍성한 기도로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