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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갈레베이 스톡옵션이란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어느 소식이든지 인재를 얻기는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이제 막 창업을 한 기업이면 더욱 그렇습니다. 시스템이 없는 만큼 또 고생은 고생대로 해야 하는데 거기 간다고 해서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유능한 사람을 데려와야 하는데 그 사람의 연봉을 맞춰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실 그렇게 탁월한 사람, 여러 사람 몫을 하는 사람은 이미 지금 다니는 직장에서도 상당한 대우를 받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연봉을 맞춰주기 어려울 때 스톡옵션을 사용하게 됩니다. 나중에 지분을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도록 약속을 주고 데려오는 겁니다. 애플의 스티븐잡스가 그렇게 했습니다. 사실 스티븐잡스는 애플을 창업하고 또 경영을 하다가 본인이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나중에 애플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 다시 회사에 돌아가면서 이렇게 제안을 합니다. 내 연봉은 1달러로 하겠다. 대신 스톡옵션을 행사하겠다. 이렇게 제안을 했습니다. 물론 회사가 잘 되면 주가가 올라서 큰 돈을 벌게 되지만 주가가 오르지 않으면 급여도 받지 못하고 다 날리게 됩니다. 그것을 챙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스톡옵션을 제대로 행사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갈렙입니다. 무려 45년을 버텨서 행사한 사람입니다. 혹시 여기 계신 분들 중에 주식하다가 물린 분 계십니까? 조금 예민한 질문입니다. 아마 그래도 10년은 되지 않았을 겁니다. 몇 년 안 되었겠죠. 그런데 갈렙은 45년을 기다렸던 겁니다. 오늘 갈렙의 엑시트를 같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땅 분배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가난을 정복하면서 각 지파별로 살 곳을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디를 얻느냐에 따라서 앞으로 미래가 결정됩니다. 나의 미래는 결정되면 어떻게든 감수할 수 있을 텐데 나와 내 자손들, 또 그들이 앞으로 살아갈 터전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손해를 보고 양보를 보더라도 내 자식의 문제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지게 됩니다. 특별히 땅 분배 과정에서 대표로 모인 자들, 또 그 한 사람, 한 사람은 고상하고 또 신앙의 사람일지 모르겠지만 또 자기가 속한 지파의 대표로 올 때는 어찌되었든 가장 이익이 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서 쉽게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분배 과정을 맡은 여우수와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다루는 것 자체가 골칫거리입니다. 어떤 기준으로 나누든지 간에 다들 항의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손해를 본다 생각하면 거기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하다 못해 자식들끼리 얼마 되지 않은 부모의 유선을 나누는 것도 소송으로 가기 쉬운데 앞으로 자녀 손들이 대대로 살아갈 기업을 받게 되는 시간입니다. 지금도 사실 가난과 정복 전쟁 중입니다. 다들 손에 칼을 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타면 칼날의 방향이 서로를 향하게 될 수 있는 거죠. 가난한 주민들을 향해서 들었던 칼이 언제 형제들을 위해 들게 될지 모르는 겁니다. 그 위로 다른 가난한 족족과 연합해서 동족을 칠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신라가 당나하와 연합해서 백제와 고구려를 쳤던 것처럼 이 정복 전쟁 과정 속에서 혹여라도 땅 분배 과정에 문제가 생기면 그 다음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일단 요단 동편 지역,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동편 지역은 이미 선점한 지파들이 있어서 그들에게 할당을 했습니다. 장자였던 루르벤 지파, 그리고 갓 지파, 요셉의 자손인 문하세 지파가 가난 동편 지역, 요단 동편 지역을 택하였습니다. 이들은 목축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목축하기 좋았던 요단 동편 지역을 먼저 요구했던 것입니다. 대신 정복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함께 하기로 약속을 하고 그 땅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요단 서편이 남았습니다. 아홉 개 지파, 반이 남아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누어야 되겠습니까? 전쟁을 한 만큼 전쟁의 기여도에 따라서 배분하는 게 좋겠습니까? 아니면 인구수에 따라 배분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또는 다른 야곱의 아들들이니 그 순서대로 배분하는 게 좋겠습니까? 똑같은 넓이라 할지라도 또 어디는 상간이고 어디는 평지일 것입니다. 공정하게 나누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제비뽑기로 땅을 분배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라면 제비뽑기로 나눈다고 하면 만족하시겠습니까? 수긍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부모님이 유산을 물려주는데 제비로 뽑아서 주겠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당연히 인정을 하시겠습니까? 네, 지금 인정을 못 하시는 것 같은데요. 일단 그런 부모님이 있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쉽지는 않죠. 당연히 군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그 분배 과정 속에서 사실은 공정해 보여도 그 밑에서 어떤 수적을 부릴지 모르는 겁니다. 우리도 협상을 할 때 원칙적으로는 동의를 할지라도 아주 세부적인 조항에서 우리가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떤 장난을 칠지 다른 지파들은 어떤 계략을 꾸밀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실제로 요셉 자손이 불만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뒤쪽에 여우수하 17장에 보면 요셉 자손들이 찾아옵니다. 여우수하를 만나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여우수하도 요셉 지파입니다. 에브라엠 자손입니다. 요셉 자손들은 우리 집안 어른인 여우수하님이 지도자인데 우리한테 더 주지는 못해도 손해는 끼치지 않겠지 아마 내심 이런 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다른 지파들과 똑같이 반응합니다. 우리는 인구 수가 이렇게 많은데 이 좁은 땅에서 어떻게 살라고 그렇게 똑같이 줍니까? 여우수하에게 따지러 온 것입니다. 너무 공정하게 한 재미만 주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진 겁니다. 거기에 산지에 철병거가 있는 곳입니다. 정복하기도 어렵고 좁은 땅을 주워서 어떻게 하겠냐? 그렇게 항의를 했던 겁니다. 물론 여우수하가 요셉 지파이기 때문에 아마 집안 어른이기 때문에 권위로 눌렀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일들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유력한 유다지파가 여우수하를 찾아왔습니다. 유다지파의 지도자인 갈렙이 여우수하를 찾아왔습니다. 갈렙은 어떤 사이입니까? 오래전 목숨을 걸고 함께 싸운 동지입니다. 나이 마흔에 함께 정탐을 다녔습니다. 그 길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가난한 땅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그렇게 정보를 수집하고 또 백성들에게 돌아와서 내용을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다른 정탐꾼들의 보고에 낙심하였습니다. 절망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인숙이 13장과 14장에 보면 그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백성들이 밤새 통곡하면서 다시 애국으로 돌아가자 우리가 새로운 지도자를 뽑자 우리가 여기서 포기하자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갈렙과 여우수하는 목숨을 걸고 가난으로 올라가야 된다. 정복을 해야 된다. 어찌 보면 소수의 의견을 내었던 그런 동력자였습니다. 백성들이 이들을 죽이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셨고 이들을 살리려고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께서 갈렙을 칭찬하시면서 이런 약속을 주십니다. 인숙이 13장 24절 말씀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라 쓴 측 그와 같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드리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래라. 하나님께서 갈렙을 어떻게 부르십니까? 내 종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종이라는 표현은 쉽게 쓰는 표현이 아닙니다. 여우수화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언제 종으로 부르셨는지 아십니까? 여우수화는 처음 소개될 때 눈의 아들 여우수화, 모세의 수종자 모세의 종이지 여우와의 종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우수화가 등장할 때는 그렇게 했는데 여우수화가 마지막에 24장의 눈을 감게 되었을 때야 그제서야 여우와의 종, 여우수화 이렇게 설명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갈렙은 나의 종이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를 아주 특별하게 여겨주셨습니다. 그리고 갈렙에게 그가 밟는 땅을 주겠다고 단단히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날 이후로 여우수화는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또 역사 속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45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갈렙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사실 여우수화 입장에서 다른 사람들은 부담스럽지 않았을 겁니다. 사실 아쉬울 게 없죠. 그런데 갈렙만은 참으로 부담스러운 사람입니다. 물론 오랜만에 다시 만난 동지입니다. 이제 노년이 되어서 추억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그때 함께 살아남았던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당대를 추억할 수 있는 사람이 이제 갈렙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사람들이 광야에서 숨을 거둬왔고 이제는 갈렙만 남아있습니다. 그렇게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풀면 좋겠지만 그럴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여우수화는 땅 분배를 맡은 책임자이고 갈렙은 유다지파의 지도자로 오게 되었습니다. 갈렙이 어떤 요구를 하게 될지 유다지파를 위해서 무엇을 달라고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물론 그 얘기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갈렙의 청을 거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가 무엇을 달라고 할지라도 안 줄 수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실 45년 전에 그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 그 일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은 이제 갈렙과 여우수화밖에 없습니다. 그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사실 이를 통해서 유다지파의 특별 대우가 빌미가 되면 다들 자기 몫을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다들 자기의 기여에 따라서 또 요구하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원칙이 깨어지게 될 때 순식간에 이스라엘의 연합도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특별히 갈렙은 그니스 사람이라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여기서 그니스 사람이라는 것은 유다지파가 아니라는 겁니다. 원래 아브라함의 혈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 소수민족들, 이스라엘과 함께 가나안으로 함께 갔던 이들 중에 그 소수민족들은 사실 유다지파로 포섭이 됩니다. 포함이 된 것입니다. 나중에야 합류가 된 것이죠. 사실 이 사람은 갈렙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기 때문에 지도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주류가 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어쩌면 하나님께서 내종이라고 하였지만 여우수아가 지도자가 된 것은 그런 조건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갈렙은 유다지파 안에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또 유다지파에서도 여우수아를 상대하려면 누구를 보내야 되겠습니까? 협상 책임자로 갈렙을 보내야 됩니다. 여우수아 가장 불편한 사람, 거절할 수 없는 사람 그렇게 갈렙을 보냈던 것입니다. 올 것이 온 것이죠. 갈렙은 최적의 타이밍에 스톡옵션을 행사하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살펴보면 지난 날의 헌신을 대가로 오늘날에 무언가를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당연할 수 있습니다. 젊은 날의 수고에 대해서 보상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어느 조직이든지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것이 기업이라면 돈이나 주식이 될 수 있고 또 물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직위와 같은 그런 명예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잘못이 아니죠. 그 수고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그 셈법이 다르다는 겁니다. 어떻게 그 가치를 질 수가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퇴직금을 줄 때도 지난 3개월의 임금을 기준으로 계산을 하게 됩니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초창기를 기준으로 보상하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내가 아니었다면 이 조직이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고 소리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라면 어떻겠습니까? 교회에서도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젊은 날에 그렇게 주님을 위해 열심히 애쓰고 수고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교회에서 얻을 수 있는 반대급분은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주님께 헌신했을 때 무엇을 원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교회 내에서의 어떤 인정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직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물질적인 대가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크고 가진 것이 많다면 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계산하기 시작할 때 당혹스러워진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수고를 존중하고 인정해 줘야 됩니다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서 그것을 권리로 요구하게 된다면 심각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향해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주님께 이렇게 섬겼는데 주님 그래도 이 정도는 챙겨주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이런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우리 신앙이 병들기 시작합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섭섭한 마음이라고 하죠. 섭섭한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는 건 사실은 이제 계산하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나의 헌신과 반대급분을 저울질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거래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정당한 대가를 달라, 값을 제대로 쳐달라. 이제 장사꾼이 되어서 흥정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흥정하는 곳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단지 거래만 존재할 뿐입니다. 그 서운함, 원하는 만큼 얻지 못했을 때 경험하게 되는 그 서운함이 우리의 신앙을 갉아먹게 됩니다. 내가 받지 못한 그 인정 때문에 서운하게 된다면 우리의 영혼이 병들게 된다는 것이죠. 사랑으로 감당했던 일을 계산하기 시작한다는 건 이미 사랑이 끝났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남자가 한 여인에게 열렬하게 구애를 했습니다. 자기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내어주었습니다. 값이 비싼 선물도 주고 또 자기의 시간을 내어주었습니다. 지급정성으로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한 그 사랑의 수고를 값으로 계산하기 시작했다는 건 어떤 의미입니까? 그 사랑이 끝났다는 것이죠. 이제는 그 사랑이 끝났고 성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충성으로 감당했던 일들에 대해서 그 반대급부를 따지기 시작하는 순간 사실은 이 관계는 이미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이제 거래의 내역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것은 남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갈렛도 이제 모든 거래를 마치고 가장 좋은 땅을 요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긴장된 순간에 갈렛이 모세 앞에서 고백을 합니다. 우리 14장 12절 말씀 같이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농사짓기 좋은 평야도 아닙니다. 목숲하기 좋은 초지도 아닙니다. 서쪽의 해안쪽, 또 고기 잡기도 좋고, 또 지중해로 나가기 좋은 그 좋은 곳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꺼려할 만한 그런 산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곳엔 성읍이 크고 견고합니다. 안약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그들은 거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남들보다 월등히 컸습니다. 육체완력으로 싸우던 시대에 그들과 맞붙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똑같이 싸운다 할지라도 저 산지까지 올라가서 비로소 싸움이 시작이 됩니다. 공격하는 종이 훨씬 불리합니다. 힘들게 올라가서 또 거기서 성 안에 있는 자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들이 더 체격 조건도 좋다는 것이죠. 거기서 얼마만큼 희생을 치뤄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어렵고 힘든 땅을 지금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갈레비의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45년 전에 얼마나 고생을 했었는지, 그가 어떤 수고를 감당했었는지 그곳으로 평생 울고 먹는 것이 아니라 지금 85세에 다시 믿음으로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편하고 쉬운 땅을 달라 해도 누가 그를 탓하겠습니까? 그런데 이를 마다하고 어렵고 힘든 땅을 요구한 것. 이것이 바로 그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갈렙도 여우수아도 그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죽었고 이제 그 순간을 기억했던 사람은 둘만 남았습니다. 그 순간에 도년의 여우수아와 갈렙은 서로를 향한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45년 전 함께 목숨을 걸고 전선을 넘나들었던 그 친구 또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함께 목숨을 걸었던 그 친구가 여전히 내 앞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 45년의 시간 동안 서로 떨어져 있었지만 변질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친구는 45년 전 나와 함께 목숨을 걸었던 그 친구인 것입니다. 45년 동안 이들의 신앙도 이들의 우정도 빛이 바래지 않았던 곳입니다. 어찌 보면 서로 간의 계산이 끝나고 껍데기만 남은 관계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들은 더 귀한 것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함석헌 선생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시의 앞부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말립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마음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여우수아는 그 사람을 가졌습니다. 아니 그 사람을 한 번도 잃지 않았습니다. 발렛도 마찬가지인 것이죠. 같은 믿음으로 그 사람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 사람으로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앙을 자꾸 과거형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신앙의 연수가 더할수록 과거에 은혜받았던 이야기들 과거에 열심히 성겼던 것들을 곱씹습니다. 물론 그 시간들도 소중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항상 현재형이 되어야 합니다. 과거형으로 끝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성기는 언제입니까? 오늘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장 믿음이 좋은 날은 언제입니까? 바로 지금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 그 마음을 지키고 주님 앞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이 주님 앞에 서야 빛이 나게 됩니다. 지난 날의 헌신과 수고도 오늘 주님을 성길 때의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단지 추억에 묻어두기에는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더욱더 크다는 것입니다. 아직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 대학 종교에 다시 오게 되면서 사실 오랜만에 뵙게 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도 10년 전에 뵀던 분들, 또 그 이전부터 알고 지냈던 분들, 또 다시 만나게 돼서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사실 교회 밖에 있는 분들도 연락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또 대학 시절, 또 지도해주셨던 교수님부터 시작해서 또 그때 함께 믿음으로 동력했던 친구들, 또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이들도 다시 연락을 하게 되었습니다. 10년, 20년 전에 또 그렇게 연락이 끊어졌던 이들도 있지만 그러나 어제 보고 헤어진 듯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고 또 각자 자리에서 주님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순수하고 뜨거웠던 분이 변하였을 때 그 눈에서 빛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가슴이 턱 막히게 됩니다. 참 존경하던 분이었는데 이전과 같지 않을 때 그 모습은 사라지고 흔적만 남게 되었을 때 가슴이 아프게 됩니다. 과거의 추억을 나눌 수 있겠지만 더 이상 미래의 소망을 나눌 수 없게 되었을 때 답답해지게 되는 것이죠. 돌아서게 될 때 슬픔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내가 알던 그분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갈렙은 여전하였습니다. 45년 동안 그의 믿음은 빛을 바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욱더 갈고 닦여서 더욱 찬란하게 빛이 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가장 힘든 곳에 가장 지분이 컸던 갈렙이 태카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가장 유력한 유다지파가 그것도 가장 많은 지분을 요구할 수 있는 갈렙이 가장 힘든 곳을 태카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나머지 지파들도 할 수 있는 말이 없을 것입니다. 갈렙이 저렇게 택했는데 유다지파가 저런 선택을 했는데 누가 좋은 땅을 달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누가 자기 몫을 요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파 간에 내전의 위협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위기의 순간을 넘어서게 된 것입니다. 이후에 유다지파는 적극적으로 공략에 나서게 됩니다. 산지와 남쪽 지방을 공략했고 또 주도적으로 그 일대를 개척하게 됩니다. 또 연약한 지파들을 도와서 그들과 함께 전쟁을 벌입니다. 다른 지파의 본이 되었던 것입니다. 훗날 유다지파에서 왕이 나오게 된 것은 단지 유다지파가 강력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이 가난 정복 과정에서 빵 분배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그 모습을 다른 지파가 보았기 때문에 유다지파를 인정하고 그들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유다지파에서 메시아가 나온 것도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갈렙은 하나님께 복을 받았습니다. 이런저런 유불리를 개선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변함없는 믿음 그것이 가장 큰 복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신실함을 지켰던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 그분이 갈렙에게 있어서 가장 큰 상급이 되었습니다. 젊은 날에 함께하실 하나님이 85세 노년에도 함께하고 계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안주하지 않고 오늘 믿음으로 택해야 될 것입니다. 오늘 삶에서 믿음으로 결단해야 합니다. 남들이 따지는 유불리도 아니고 내가 생각하는 계산으로 그것을 택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믿음으로 결단할 때에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실 것입니다. 이제 와서 약간의 명예로 남들의 인정으로 바꾼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시 결단하며 주님을 위해 살아가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영원토록 빛나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나와 내 자손들에게 가장 좋은 땅을 기업으로 주실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 그분이 우리의 기업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가장 귀한 유산을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바로 믿음. 하나님 그분을 우리 자손들에게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하는 동력자들을 놓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갈래분 45년간의 스톡옵션을 이제야 행사했습니다. 그의 스톡옵션 양지바른 땅, 비옥한 농지 누구나 원하는 그런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젊은 날의 헌신을 개선하지 않았습니다. 더 큰 믿음으로 새로운 땅을 택하였습니다. 믿음의 동력자 여우수아를 다시 얻었고 온 이스라엘을 살렸습니다. 먼 훗날 메시아에 오실 길을 예비하였습니다. 가장 값진 것을 택하였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도 갈래과 같이 가장 좋은 것을 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